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레브레니차 학살 (문단 편집) == 관련 증언 == >나는 세르비아인을 부모로 보스니아의 포발리치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다. 그 후 사라예보로 무작정 상경해 노점상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중 아는 사람의 부탁으로 1992년 5월부터 사라예보 근교에 주둔하고 있는 세르비아 민병대에 식량을 공급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 일을 시작한 데에는 세르비아 방송의 영향이 컸다. 세르비아 방송은 이슬람교도들이 보스니아를 회교 공화국으로 독립시켜 세르비아인을 말살하려 한다는 것을 되풀이해서 강조하곤 했다. 나는 정말로 큰 충격을 받았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 모두는 이슬람교로 개종해야 될 것이고 결국 그들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때부터 곳곳에 모인 세르비아인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 저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인종 청소’하지 않으면 우리 세르비아인은 결국 처참한 말로를 맞게 될 것이라는 얘기들이었다. 세르비아 민병대에 식량을 공급하면서 만난 민병대원들은 이같은 얘기들을 더욱 강조했고, 특히 이슬람교도로부터는 어떤 값진 것이든 탈취해도 좋고 이슬람 여자들을 강간해도 좋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로 인해 태어나는 아이들도 세르비아인이 되어, 결국은 세르비아인의 수를 늘려 나가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인종 청소의 방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곧바로 민병대에 자원입대했다. > >6월에 민병대에 들어간 뒤 다른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이슬람교도 지역인 보스니아 서북부의 아하도비치 마을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한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두 명의 노파가 있었는데 한 노파가 가진 게 없다고 강변했다. 나는 화가 나서 그 노파를 총의 개머리판으로 쳐버린 뒤 옷장을 열어 보니 여러 종류의 귀금속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모두 죽이기로 했다. > >당시 집 안에는 모두 열 명의 이슬람 교도가 있었다. 나는 단 2초만에 14㎝의 칼로 한 사내의 목을 베었다. 이미 나는 한 늙은 세르비아 민병대 병사로부터 목을 자르는 방법을 배웠었다. 어느 날 그는 나와 다른 세 명의 동료를 돼지 우리로 데리고 가더니 돼지 목을 어떻게 베어 죽이는지 가르쳐 주었다. 그는 자기가 사로잡은 보스니아 이슬람교도를 '''모두 그런 식으로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 >우리는 나머지 아홉 명을 모두 집 밖으로 끌어냈다. 나는 그들에게 벽에 기대라고 명령했다. 그 가운데에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애가 무서웠던지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우리는 기관단총을 발사했다. 민병대 지휘관들은 이슬람교도 한 사람을 죽이는 댓가로 6달러 50센트를 지불했다. 인종 청소가 끝나자마자 마을을 불질러 버렸다. > >6월 초순, 나는 들판을 지나가다가 또다른 민병대원들이 1백여 명 가량의 이슬람교도들을 학살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은 시체를 트럭에 실어 한적한 곳으로 옮긴 뒤 휘발유를 부어 불태워 버렸다. 7월에는 또다른 회교 마을에서 세르비아 민병대가 30명의 이슬람교도를 죽인 뒤 근처에 있는 용광로에 넣는 것을 보았다. 그때 몇 명은 신음 소리를 내며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 >7월 초 나는 사라예보 근교에 있는 한 건물에 들어갔다. 이곳은 이슬람 여성들을 수용하는 곳이었는데 미로 부코비치라는 민병대원이 관리하고 있었다. 부코비치는 이슬람 여성을 강간한 뒤에는 반드시 죽이라고 명령했다. 나는 일주일에 서너 번 그 수용소로 갔다. 그곳에서는 매일 수많은 여자들이 강간당하고 죽어갔다. >6월 초순 나는 들판을 지나가다가 세르비아 ‘특별수사대’란 단체가 1백20명 가량의 회교인을 학살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은 덤프트럭을 이용해 사라예보 근처의 한 철도 야적장으로 시체를 운반했다. 병사들은 야적장에 구덩이를 파 시체를 묻은 후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 >7월 어느날 보스니아 북부 보고스카시에서 서북쪽으로 3마일(약 5km) 떨어진 회교마을에서 나는 세르비아 병사들이 30명의 회교인을 학살해 그 시체를 근처의 제철소 용광로에 집어넣는 것을 보았다. 용광로에 던져질 때 몇사람은 아직 살아 있었다. > >7월 초 나는 사라예보에서 자그레브로 가는 길목의 음식점을 겸한 여관에 들어갔다. 그 여관은 회교 여성만을 수용하는 교도소로 바뀌어져 있었는데 미로 부코비치라는 세르비아인 병사가 책임자였다. 부코비치는 회교 여성을 강간한 후에는 반드시 죽이도록 하는 일종의 규칙을 만들어놓았다. 그는 회교 여성을 강간하는 것이 병사의 사기를 올리는데 아주 좋다고 말했다. > >나는 수많은 여자를 강간한 후 죽였다. 에미나, 사비나, 아멜라, 파티마…아직도 생생히 떠오르는 이름이다. 개중에는 10대도 있었고 많게는 35살 먹은 여자도 있었다. 부코비치는 내게 “여자들에 대한 처리는 알아서 해라. 일단 여관에서 끌고 나간 후엔 다시 데리고 오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30세 가량의 파티마라는 여인을 강간한 후 총으로 위협해 차에 태워 근처 야산으로 끌고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산으로 가는 도중에 총살해버렸다. > >나는 일주일에 서너번 꼴로 모텔에 갔다. 회교 여성은 거의 매일 강간당하고 죽어갔지만 늘 넘칠 정도로 수가 많았다. 따라서 맘에 내키면 언제든 열쇠를 가지고 방안에 들어가 아무 여자나 닥치는 대로 고르면 그만이었다. > >'''내가 지난 6개월 동안 저지른 짓은 분명히 잘못한 일이다. 요즘도 밤이면 내가 죽인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라 식은땀이 흐른다. 잊으려고 애를 써보아도 자꾸만 떠오르는 오스만과 할머니 뒤로 숨던 빨간 옷을 입은 꼬마소녀의 모습은 지워지지 않는다.''' >------ ''<뉴욕 타임스>의 존 번스 기자가 전쟁 중 21세의 세르비아 민병대 출신 보리슬라브 헤라크를 7시간 동안 인터뷰한 내용 중 일부 발췌''[* 그와의 인터뷰 중 그는 자신이 8차례나 아녀자를 강간한 후 잔인하게 살해했고 그 외에 모두 29명의 보스니아 무슬림을 죽였다고 증언했다.] [[https://www.nytimes.com/1992/11/27/world/a-killer-s-tale-a-special-report-a-serbian-fighter-s-path-of-brutality.html|A Killer's Tale -- A special report.; A Serbian Fighter's Path of Brutality]] >"한 군인이 군중 가운데 있던 한 여자에게 다가가더군요." 그가 말했다. "그 여자의 아이가 울고 있던 거에요. 군인이 이 아이가 왜 우냐고 묻자 여자는 배가 고파서라고 그랬어요. 군인이 이렇게 말했어요. ''''이제 배고플 일 없을거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이의 목을 칼로 그어버렸어요.'''" >("One soldier approached a woman in the middle of a crowd," he said. "Her child was crying. The soldier asked why the child was crying and she explained that he was hungry. The soldier made a comment like, 'He won't be hungry anymore.' He slit the child's throat in front of everybody.") [[http://edition.cnn.com/2012/05/16/world/europe/mladic-profile/|출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